성격 : 좋게말하면 활발하고, 정확히 말하면 걸걸하다. 눈에 띄는 외양만큼이나 성격도 정신 사나운데, 성격 탓에 학교에서의 평판은 정확히 두 갈래로 나뉘는 모양. 눈치 없이 시끄러운 애라는 평과, 튀는 분위기 만큼 어쨌거나 호탕한 애라는 평가. 최근엔 소소하게 얻은 유명세로 후자의 이미지에 가깝다. 말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어린 시절을 지나, 말도 몸도 먼저 튀어나가는 스타일로 자랐다. 붙임성이 좋아 두루두루 잘 치대고 다닌다. 사교성이 좋다기엔 걸리는 구석이 많다.
기타사항:
- 관심 분야는 보컬, 미용 등이 있지만, 진로로 잡은 것은 연극이다. 대본 숙지가 굉장히 빨라 교내외로 참가하고 있는 동아리가 많으며, 특유의 활기로 무대를 쏘다니는 스타일의 역을 성별에 구애없이 맡곤한다. 공연영상들로 인해 최근엔 유튜브에서 얼굴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으나, 어쨌거나 아직은 평범한 고등학생의 범주이다.
- 연극 못지않게 노래에도 진심이다. 의외의 엔터테이너. 판에 박히지 않고 끝을 흘리는 듯이 부르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가 특색. 샤우팅한 저음이 주 영역이나 피아노록 - 록발라드 계열의 다소 잔잔한 노래들도 즐겨부른다.
- 기억력이 좋다. 공부라도 해보면 어떻겠냐는 랜스의 등살에 1학년 때에는 일반지리, 철학 과목에서 대뜸 A 를 받기도 했으나, 자리에 여섯 시간을 꼬박 앉아 있을 바에야 자퇴하고 햄버거 패티순서를 외워 맥도날드 슈퍼바이저를 목표하겠다는 말과 함께 게으르고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 사촌 집에서 거주 중이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대학을 일찌감치 단념한 것과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좋아하는 음식은 포크커틀렛 , 마실 것은 살짝 탄산 빠진 레모네이드
- 같이다니는 애들이 아주 의외라는 평가 ... . 가끔 웃으며 이놈들이 왜 자신과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우스갯소리 같은 말과 달리 각별히 의지한다는 건 가까이서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관계:
- 랜스: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 반장이었는지, 반장을 제치고 그런 존재감이었던 건지는 가물하지만 (랜스 본인도 그럴 것이다.) 집이 같은 방향인 덕인지, 등하교도 종종 함께 하며 같이 어울려 다녔다. 틈만 나면 피드백 해달라며 의자를 하나 끌고 와 조촐한 단독 공연을 열어주기도 한다.
- 빌리: 그렇게 같이 오며가며 했던 랜스의 대가족장남 소꿉친구가, 설마 남의 지우개 가져다가 예술을 해놓고 물음표 하나 멀쩡히 지우지 못하게 만든 놈일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의 유머코드가 통해 어느순간부터 편해진 사이. 간혹 빌리가 웬만한 일에 나서지 않고 관망하는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묘하게 바라보곤 한다. 역시 일방적인 연습 공연 초청이 빈번하다.
- 조&로건 : [밴드부] <Reds>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허레이브 고교 내 밴드부. 기타 조, 드럼 로건, 보컬 유라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근 활동영역을 포름 바깥까지 넓혀가고 있다.
유라는 기억력이 아주 좋았다. 잊지않으려고 마음 먹은 것과 선명해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때의 제 호흡, 비가 오는 날씨였는가, 상대방의 말의 조사, 그 언성 혹은 말투, 시선, ... . 그리고, 일주일에 육 일을 하루에 열 두시간 동안을 구두약에 라벨을 붙이느라 잊을래야 잊을 수 없던 라벨지에 담긴 구두약 성분의 표기와, 그 속에 둥근 사탕이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착각할 지 모를 뚜껑의 선명한 문구를 모조리 기억했다. 이 단조로운 삶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은 너무 없었다. 아주 어릴 때라 그 순간이 흘러가는 것일 수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었을까. 큰 것이 아니어도 좋았을텐데. 그냥 머리를 빗겨주거나, 공장에서 함께 일을 마치고 돌아가거나, 옆 단지 아이의 정강이를 어떻게 차주고 왔다는 이야길 하거나, 아니면 힘들었겠다, 고 안아주거나... . 가장 특징할만한 삶의 빈칸에 재능이 아닌 다른 것을 적는다면, 지독하게 사람운이 없던 것이 될지도 몰랐다.
연고없는 아이들이 한 방에 모여 하는 이야기엔 배경이 빠지지 않았다. 배경, 한 사람의 맥락은 어쩌면 그 사람과 구분지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거였다. 유라는 움츠러들지는 않았다. 다만 말할 것이 아주 적었다. 과거를 물으면 망설이는 것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하는 회상도 없이, 고아원에서 자랐고 구두약 공장해서 3년 일했노라 하면 끝이었다. 태생적으로 솔직했으니 숨김없는 말 그대로 한 문장의 단언으로 남은 것이 제 어린 시절이였다. 글로스터셔 주에는, 기억은 있었을지라도 제가 두고온 추억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말의 끄트머리에 이게 행복한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네가 마음 쓸 일이 아니야, 라는 것을 붙이면 뒤는 없었다. 제 것이 유일한 불행은 아니었음을 알았으니 대상없는 원망은 하지도 않았다. 그럴 바에야 앞을 보겠노라 하는 건 천성이었다. 그저,
나는 가진 것이 적어 말해줄 것이 없었다고.
그래서, 그려본 적 없으니 상상도 하지못했을 가족의 애정은 열망한 적도 없고, 그랬으니 열등감을 느낀 적도 없었다. 다만 가족이란 종교와 같은 것일까 짐작한다. '엄마에게 이를거야' , 라며 정강이를 걷어차인 아이가 퍼뜩 무력감 속에서 고갤 쳐들었을 때, 알데히드에서 간증과 맹세를 하고 돌아온 손윗 여공이 고개를 들고 공장장 옆에서 걸어나오던 순간과 닮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것이 맹목적이어서 기이했을 뿐이다. 탐나지 않았다고 자부해왔다. 모르는 것이니 영영 모른 채로 두고 싶었다고. 나눌 것이 적어 나누지 못했을 뿐이었다. 참 메마른 시절이었다.
그리고 7년이었다. 최초의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11살까지 자란 그 시간만큼을 한번 더 살았으니, 명확히 나뉜 두 번째 삶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든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유라는 우습게도 이것이, 유일한 불행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부정할 수 없는 불운한 제 삶에서 유일할 것이라 직감한, 아주 즐거운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억하려 용쓰고 싶었던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철없게 아주 가끔, 이대로도 좋지 않겠냐는 생각은 너무 평화로운 새벽에만 가끔 들었다. 누구에게 입도 뻥끗 않고 누르고 잠들면 다시 아침이었으니 그렇게 보낸 날들이 더럿 있었다. 조금 옛날이다.
그것이 불꽃이 된 것은, 두렵지 않느냐는 물음표에 온점만 새기기로 결심하고 마는 것은 언제부터 였는가.
붙들고 싶은 것이 많아져 손에 쥔 것이 칼인지 깃발인지 횃불인지 손수건인지 유리조각인지, 아니면 너희의 손인지 알 수 없던 즈음 부터 였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끔은 눈감고 영영 나중은 모른척하고 싶은 지금의 행복을 연장하는 삶, 세례식을 전후로 어떻게 바뀔 지 모를 지금 우리의 동행을 향한 쪽임을 확신하게 된 순간부터다. 혼자 아닌 미래를 그리며 잠든 새벽. 그 확신에는 뿌리가 있다. 삶을 성급하게 재단하지 않아도, 이제 유라는 삶이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살다 보면 가지를 뻗는 나무처럼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하겠지만, 그 뿌리에는 항상 우리가 있을 것' 이라 정확히 외운 랜슬롯의 믿을 수 밖에 없는 위로처럼. 잿더미 속에서도 불씨를 일으키고야 말 이의 단단한 손을 붙들어서다.
그래서 그렇게 답하고 마는 것이다.
" … 걔가 보는 시야를 어찌 할 순 없지만, 손은 잡아줄 수 있겠지."
선하고 멍청한 아이는, 자신이 받은 방식의 위로를 변주하지 못한다. 제가 그것으로 위로받았으니 타인도 그럴 것이라 응당 생각해버리고 만다. 유라는 이제 아이는 아니었지만, 선하고 똑똑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받은 위로가 적었다. 또 다시 나눌것은 적었다. 적었으니 더 아낄 수 있다고 다짐했다. 다짐은 소통이 되지 못한다. 다짐은 제 안으로만 고이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정말로 그럴 때는 아주 슬펐다.
새벽, 손은 이어져 다시 붙든다. 무릎을 꿇은 채였다. 아주 슬픈 것을 직감하고도 다짐을 꺼내 입을 여는 것이다.
빌리, 우리랑 같이 가면 안돼? 하고.
아이들이 미래를 이야기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고, 또 미래를 이야기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갇힌 삶에서 바깥에 있을 자유를 갈망하는 죄없는 죄수자로서의 당연함.
어렸으니까, 보지 못한 세상이 많기에 조금 더 날고싶은 날개가진 것으로 태어난 본능같은 당연함.
그리고 억압되고 감시된 장소에서 학습된 아이의 무력감으로서의 당연함.
깨어지고야 마는 진실을 알기에 섣부르게 기대하지 못하는, 수평선 아래에 잠긴 당연함….
그 사이서 유라는 위를 본다. 불은 위로만 향한다. 위로만 향한다는 것은, 제가 갖고 태어나지 못한 맹목을 꾸는 것이 아니다. 쌓이는 잿가루처럼 고이기만 할 다짐을, 기어이 전하고 싶은 슬픈 순수다. 위를 향하면 어디든 닿을 거라 믿을 뿐이다. 부모나 종교가 있는 아이처럼. 손을 잡고 메마른 저를 태우고 싶었다. 사납고, 용맹하고, 다정하고 싶었어 …… .
지하의 많은 곳은 길이 험했다. 레인은 지하에 온 지 일 년을 조금 덜 채웠고, 제가 모험하지 않은 곳은 이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얼마 남지 않았다. 일마는 지도를 만든다 했다. 저보다 멀리까지 바깥에 나다니는 아이는 없었으니, 지금 걷는 길은 새로 그려넣어야 할 것이었다. 머릿속에 지나온 길을 그려본다. 태양의 빛이 들지 않는 이 곳은 이슬이 마를 일 없어 늘 축축했다. 경사진 길 마다 미끄러지려는 것을 느릿느릿 벽을 짚어 걸었다.
사람이 가꾸지 않은 길은 어디선가 가로막히기 마련이라, 그 길도 어김없이 이 세상의 천장을 지고 있는 기둥처럼 깜깜한 암벽이 나타났다. 하루 웬 종일 걸어올라와 맞닥뜨린 암벽을 보고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준비했다는 듯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냈다. 노란색 깃발이었다. 축축한 땅을 조금 파내고, 깃대를 팍 꽂은 뒤 잘 묻어 세우면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서 미동도없이 깃발이 우뚝 섰다. 뿌듯함도 서러움도 없는 표정으로 멀거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축축한 땅 위로 털썩 누웠다. 그리곤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인은 너무 까매서 푸르게도 보이는 천장을 때때로 하늘이라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는 낮도 밤도 구분없고 이럴 때 땀에젖은 머릿칼을 쓸어넘겨주는 손길같은 바람도 그 손길도 없다. 그래서 눈을 감고, 딱 그 손길만큼의 이름들을 왼다. 나는 기다릴 수 있어요. 그리고 상상해본다. 아무도 제게 기다림을 말로 약속해주진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지도 못했을 즈음에, 아주 우연한 순간처럼 어느날엔가 하나 둘씩 계단을 딛고 내려올 것이다. 빛을 등지고 깊은 땅으로 걸어오는 그들을 하나하나 맞이하며 그 날 밤마다 작은 축제처럼 왕국 사람들이 모두 나와 춤을 추겠지. 우리는 군인들이 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윤기있고 포근하고 따뜻한, 맛있는 것들을 나누어 먹으며 웃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도 그리워한 삶의 이야기를 통째로 듣느랴 밤은 지나도 지나도 끝이 없겠지. 어차피 해가 뜨지 않고 아무도 낮이 온 줄 모를테니 이야기의 끝까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을 것이다. 다같이 누워 어느날의 구석에서 처럼, 칭얼거리고 투닥이고 실컷 웃고 …… .
다시 눈을 뜬 레인은 그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종종 아껴먹곤했던 일마가 준 초콜렛 처럼. 가끔 숨이 차고 아득해질 때면, 지상의 빛을 등에 이고선 한 발짝씩 계단을 내려오는 그 발부터 마음 속에서 꺼내보곤 했다. 언젠가 다가 올 확신 있는 미래였으니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다만 '언젠가' 였기 때문에. 가령 오후 네 시에 온다면 세 시부터 행복해질 수 있을 지도 몰랐지만 ... .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사실이 생각날 때 마다 덜컥 마음이 초조해지고 기쁘게 달아오르고, 또, 미로의 유혹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 , ... .
순간 누군가 속삭이듯, 아주 조그맣게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키가 커질수록 엉켜들기만 하는 생각에 빠져 흐렸던 시선이, 작은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퍼뜩 고갤 들고 누가있냐며 소리내 물을 것도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고요하고 고요했을노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제쪽으로, 꼭 이 손을 잡으라는 듯이, 수줍게 재촉하듯이, 유혹하듯이.
" 누구세요 ?"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타이밍 좋게 깃발이 뾰족한 끝을 접으며 두어번 파닥이듯 휘날렸다. 그리고 다시 잠잠해지는 것이다. 레인은 제가 꽂아놓은 깃발에 성큼 다가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갤 늘어뜨린 천의 끝을 잡고 촥 펼쳐보았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후두둑 무언가가 떨어졌다. 황급히 다른 손으로 받아냈다. 까슬까슬했다. 의아한 얼굴로 손바닥을 펼쳐보니 모래였다. 물기 하나 없이 건조했다. 어디서 나온거지? 눈을 깜빡이며 어두운 와중에 그것들을 자세히 보려 내린 시선이 암벽에 닿았다. 단단하고 어두운 암벽 앞으로 마저 걸어가 목을 쭉 빼고 들여다보니, 어두워 보이지 않았던 커다란 균열이 두 갈래로 쩍 나뉘어 있었다. 길이 끝난게 아니었다니!
손을 뻗어 깃대를 뽑아들고, 허릴 숙여 작은 균열 틈 사이를 걸었다. 키가 조금만 더 자랐더래도 들어가지 못할 조그마한 동굴 이었다. 벽 사이의 이끼들에 볼을 부비며 짧은 동굴을 지났다. 혹시라도 몸이 낄까 느리게 걷는데, 젖은 이마를 다시 훅 쓸어넘기는 바람이 불었다. 놀란 눈동자에 닿는 더운 열감이 바람에 실려있었다. 그리고 곧 세상이 나타났다.
처음보는 광경이었다. 주황색 모래들이 산처럼, 혹은 파도처럼 넘실이는 모양으로 웅장하게 늘어져 있고, 제가 느낀 바람은 그 능선에 닿아 끄트머리의 알갱이들을 그 옆으로 옆으로 조금씩 옮기고 있었다. 바람에 기대어 평생을 쉼없이 변모하고 살아가는 것은 이슬이 고여 녹아 바뀌는 지하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한 때 열기를 머금은 것 같은 날쎈 바람 탓에 금새 제 머리에도 모래가 섞여 들었다. 깃발을 쥔 축축한 손에도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 모든 새로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천장이 컴컴했다.
여기는 정말로 지하 어른들 중 누구도 와본 적 없는 곳일거야!
세상의 끝을 찾아가보는 것이 제 임무였으니, 레인은 부푼 마음으로 사막을 걷기 시작했다. 축축했던 신발창에도 모래가 묻고, 푹푹 빠지는 모래더미들 새에서 가끔 허우적대어도, 바람이 그의 등을 떠밀어주듯, 털어주려는지 모래를 뿌리는지 모르게 머리를 즐겁게 마구 헝클고 지나가면 어쩐지 그리워했던 손길같기도 했다. 여기는 바람이 불어, 우리가 살던 지상 처럼! 지하 아이들이 좋아할거라 생각하며, 깃발을 꼭 쥐고 성큼성큼 걸었다.
길은 아까보다 험하진 않았지만 지도를 그리기엔 너무 어려웠다. 지표삼을 것이 없어 제 발자국을 들여다보며 걸어야했다. 중간에는 잠시 물이 고인 사막 속의 호수에서 손과 발을 씻어내고, 이어오는 바람에 다시 모래를 묻히느랴 퉤퉤 입을 털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한참을 걷다, 처음으로 저 멀리 보이는 물체에 걸음을 멈췄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하고 보니 작은 비행기 였다. 지하에서 천장에 닿으려고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없지만, 가끔은 그러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사람은 대개 저와 통하는 구석이 있는 어른이었다. 아직까지 코속에 나비를 품고 사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발 밑에 가득 찬 모래를 다시 밟으며, 레인은 비행기 가까이 뛰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비행기는 고장이 났는지 공구상자가 바닥에 있고, 길쭉한 코에 있어야할 프로펠러가 분리된 채였다. 그 위 기판에는 넓다란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글자는 알아보기 어려웠다.
"당신도 지도를 만드나요?"
불쑥 레인이 말을 걸자, 비행기 꼬리쪽에서 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고글이 달린 모자를 쓰고, 거칠어보이는 낡은 가죽 점퍼를 입은 남자였다. 설마 군인일까? 지하에는 군인이 없다.손에는 펜도 총도 아닌 스패너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저처럼 땀에 젖은, 그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알아볼 수도 없다. 그러는 새에 남자는 말없이 레인을 한참 바라만 보고있다.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이 뻐끔이다 다물린다. 곧, 남자가 레인 앞에 느리게 다가왔다. 눈썹이 떨리고 짙고 푸른 눈이 분명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천천히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모래 때문에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아주 오래 생각해온 사람 같았다.
"레인."
꼭 슈테판 선생님 만큼 커다란 남자는 무릎을 꿇어도 저보다 작지 않았다. 같은 높이에서 시선이 교차한다. 아니, 남자의 시선은 집요하게 제게 매달리며 금방이라도 감기거나 무너지거나 하고야 말 듯 흔들렸지만, 레인은 다른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레인이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어린애여서가 아니다. 소원도 아닌 예언은 아주 정확한 방향으로 돌아와 들이맞는 것이다. 나비로 변하건 커다란 장수풍뎅이가 되건, 혹은 별 하나가 되건 ... . 알아보는 것은 니콜라의 몫이다. 저는 그 책임을 기꺼이 넘기기로, 그래서 아주 우연히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어느날에 만나기로 했으니. 울며 끄덕이며 소리질러 탓하지 않고 눌러담은 채 사랑한다 말하며 약속한 것이다.
"네가 어떻게 … ?"
그 물음에 레인은 아무것도 답하지 못한다. 그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깨닫는 것이다. 차마 저를 껴안지 못하고 앞에서 말을 더듬고 목소리를 떠는 이의 일그러진 짙은 눈썹이, 이제 앳되었다 말 붙이기엔 단단한 뼈대 위로 남겨진 상처, 그의 왼손목의 시계 아래로 드러난 흐릿해졌으나 지워지지 않은 흉터들이, 그 고통스러운 흐느낌이, 아주 그리워 하던 이의 것임을.
잠시 숨이차고 아득해진 레인은 버릇처럼 눈을 감으려 했다. 눈을 감으면 다시 그 발목부터, 빛을 이고 오는 자그마한 어린 소년의 발목을 떠올리는, 것인데. 니콜라가 레인을 와락 껴안았다.
"레인, 나를 마중나온거니? 나는, 이제 곧 죽는건가? 아, 네가."
그 포옹 탓에 눈을 감을 순간을 잃고 만 레인은 말 대신 시선을 더듬거렸다. 더듬더듬 팔을 옮겨 깃발 쥔 손을 그의 등을 애매하게 감싼다. 제 팔로 다 안을 수 없는 커다란 몸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어느 소년처럼 몸을 떨고 젖은 목소리로 저를 불렀다. 확신할 수 밖에 없었다.
"니콜라?"
"아."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을 어떻게든 붙잡아두고 싶은 사람 처럼, 처절하게 작은 몸을 껴안고 있던 니콜라가 천천히 몸을 떼고 레인을 바라보았다. 이제 시선은 서로에게 분명히 닿아있었다. 니콜라는 아주 잠깐 새에 턱끝까지 젖은 얼굴이었다. 무릎 꿇고, 레인의 허공에 뜨인 손만 그러모아 쥐고, 더듬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내 작은 흰나비 ……."
아, 니콜라 ! 정말 나를 알아봐주었군요. 나보다 먼저요. 그제야 와르르 모래사막이 무너지고 어두운 천장이 가라앉을 듯 해진다. 새까만 하늘에는 그제야 새로 별이 총총 돋아나고 푸른끼 도는 밤이된다.
우리는 만났다. 레인은 입을 열고 활짝 웃었다.
*
니콜라의 흉터 속에는 제 마음으로만 보이는 것이 있다. 차마 다 보이지는 않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사무치는 아픔이 있다. 정말 중요해서 보이지 않는 흉터가 나는 늘 슬펐지요. 요정이 된 나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요. 만약 숨구멍 세개를 내놓은 기다란 상자를 그려준다면 나는 그 속에서 네 발을 배로 누르고 구멍하나에 코를 박은 채 색색 숨을 들이쉬는 양을 찾을 수 있어요. 요정이란 건 그래요. 박제된 검은 조랑말 속에 담긴 영혼이 눈 하나 깜빡 하지 못하고 붙들린 것을 볼 수 있던 것 처럼, 세상을 모두 알지는 못해도 제가 보는 세상을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어요. 나는 니콜라의 흉터를 봐요. 그것은 옷으로 덮여있대도, 손목시계로 가려져 있대도 상관없죠…. 그 아픔은. 새벽마다 무릎 아래를 아프도록 주무르고야 말 정도로 고통스러운 성장통을 겪으며 새 살을 빚고 뼈를 늘리면서도 차마 그 차오르는 살들이 덮지못한 깊숙하고 예리한 흉터들은. 그런 것들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죠.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란히 기차처럼 서서, 호숫가의 동굴 앞에 서있던 그 마지막 밤. 지상에 남을 아이들의 소원을, 선택을 하나하나 새겨들으며 그들의 행복과 미래를 응원했던 밤. 두리번 거리던 레인의 시선에는, 그 속에서 지금 처럼 무릎 꿇고 눈물을 주룩주룩 쏟아내던 니콜라가 있다. 처절하게 소리내어 울고 가지말라 애원하고 그러면서도 차마 제 손을 쥐어 곁에 붙들어 놓지는 못했던. …아무 소원도 빌지 않았던 니콜라가 있다.
그리고 레인은 다시, 멋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입으로 발음되지도 않은 소원은 그 속에 그냥 담겨있군요. 감추어도 감추어도 나는 보고야 마는 그 흉터들 깊숙이에 박혀있군요. 아주 소중하게. 중요하게. 슬프고 그리고 조금 더 다정하게, ... ... .
"니콜라, 여긴 지금만 밤이네요. 늘 밤이 아니에요. "
" ... ... "
니콜라는, 아주 짧은 재회 후의 이별을 순식간에 직감한다.
"있지요, 내가 온 쪽에 호수가 있었어요. 여기도 호수가 있어요. 신기하죠!"
레인은 울음기는 커녕 씩씩한 목소리로, 활짝 웃으며 제가 온 방향을 가리켰다. 바람에 다시 덮이고 있는 희미한 발자국들이 손가락의 방향을 따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다시 몸을 돌린 레인은 당황하는, 아직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인 청년 니콜라를 본다. 꼬마 니콜라를 다시 만난다.
"니콜라."
흐. 입꼬릴 끌어올리고 눈도 휘어서 웃었다. 니콜라는 그 웃음을 영영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언젠가 결심했을 대로 레인의 어깨를 잡는다. 그러나 희미해지지도 허상이 되지도 않은 레인은 제 어깨를 쥔 두터운 장갑 낀 손을 바라보다, 그 손을 작은 두 손으로 감싸쥔다. 손을 풀지않고 그대로 천천히 아래로 내린다. 더 오래 잡고싶어 아주 느리게.
"나 이제 잘 웃죠. 원래도 잘 웃었는데, 이럴 때 잘 웃는 건 배운거예요."
레인은 발치에 무언가가 다가왔음을 알았다. 그것이 따뜻해서, 지하에는 영영 닿지 않을 햇빛 조각 같기도 했으나, 검고 상냥한 뱀이었다. 저를 마중나온 엘프리드를 본 레인은 니콜라의 손을 놓는다.
"그러니까 난 조금 더 오래 기다릴 수 있어요."
맞닿은 온기가 떨어진 그 순간, 레인의 발목에서 노란 빛이 퍼져나왔다. 햇살 조각이 이 밤에 정말로 거기에 닿아있었는가. 그대로 레인은 흰 나비가 된다. 니콜라의 손바닥보다 작은 흰 나비는 자그마한 소년이 발자국을 남기고 걸어온 그 방향으로 되돌아 날아간다. 그리고, 뭉쳐있던 연기가 한 순간의 바람에 빠르게 흩어져 형체를 잃듯이, 한 순간의 바람에 흰 날개가 흔들리고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발자국은 살아 움직이는 지상의 것인 사막이 바쁘게 능선을 짓고 옮기느랴 흩어져있다. 그러나 방향만이 선명하다.
니콜라는 잠시 현기증과, 언젠가 느꼈을 깊은 후회와, 무언가를 느꼈으리라 짐작한다. 그는 홀린 듯이 그 방향을 따라, 지도도 비행기도 뒤로하고 터벅터벅 걷는다. 점점 더 푸르고 희어지는 새벽의 사막을 걷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다시 무릎을 꿇는다. 철퍽이는 소리가 난다. 그의 무릎이 얕은 물에 잠겨있다. 오아시스였다. 눈물 젖은 그의 뺨에 직선으로 햇빛 조각이 떨어진다. 밤낮 구분 없는 곳에서는 뜨지 않을 해다. 뜨거운 해를 보고 잠시 말을 잃은 채 그는 목을 축인다. 살아남는다. 그의 어린 소년의 기다림을 약속받는다.